인도-파르티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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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파르티아 왕국은 기원전 1세기부터 서기 1세기까지 존재했던 왕국으로, 현재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북서부 인도 지역을 통치했다. 곤도파레스 1세가 이 왕국을 건설했으며, 파르티아의 칭호인 "왕중왕"을 사용했다. 곤도파레스 1세 사후 왕국은 분열되었고, 쿠샨 제국에 의해 북부 인도 지역을 빼앗기면서 쇠퇴했다. 이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었으며, 간다라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인도-파르티아인들은 실크로드를 통해 불교를 중국에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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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파르티아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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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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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인도-파르티아 왕국 |
존속 기간 | 20년경 ~ 130년경 |
수도 | 탁실라 카불 |
공용어 | 아람어 그리스어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프라크리트어 파르티아어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왕조 | 수렌 왕조 |
주요 지도자 | 곤도파레스 1세 (20년경 ~ 50년경) 아브다가세스 1세 (50년경 ~ 65년경) 파코레스 (100년 ~ 135년) |
역사 | |
건국 | 20년경 |
멸망 | 130년경 |
이전 국가 | 파르티아 인도-스키타이 |
다음 국가 | 쿠샨 제국 사산 제국 |
2. 역사
곤도파레스 1세가 인도-스키타이 왕국을 정복하고 왕중왕을 칭하며 인도-파르티아 왕국을 세웠으나, 왕국은 분열과 쇠퇴를 거듭했다. 쿠샨 제국의 침입으로 북부 인도를 상실했고, 결국 사산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탁실라는 인도 파르티아인의 수도로 추측된다. 존 마르샬은 파르티아 양식의 유물과 함께 큰 지층을 발굴했다. 잔디알 근처 사원은 일반적으로 인도-파르티아 시대의 조로아스터교 신전으로 추측된다.
고대 문헌에는 사도 토마스가 인도의 구드나파르(곤도파레스로 추정) 왕의 궁정에서 목수로 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토마스 행전 17장은 토마스가 인도 북부의 구드나파르 왕을 방문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고, 2장과 3장은 토마스가 인도 서쪽 해안으로 연결하는 해상 항해를 시작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필라스트라투스의 <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의 생애>에서 그리스 철학자 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는 서기 46년경 인도를 방문하여 탁실라를 방문했다. 그는 그리스 양식의 건축물이 있는 시르캅을 묘사하고,[11] 인도-파르티아 탁실라의 왕 프라오테스가 그리스어 교육을 받고 유창한 그리스어를 말했다고 설명하였다.[12][13]
아라비아해 항해 경로를 묘사한 1세기 가이드북인 에리트라해의 페리플러스는 신드 지역에서 서로 싸우는 파르티아 왕들의 존재를 묘사한다.[16]
타크티- 바히의 비문에는 마하라자 구드브하라(곤도파레스로 추측)의 연호 26년과 알려지지 않은 시대의 103년이라는 두 개의 날짜가 있다.[18]
2. 1. 인도-파르티아 왕국의 성립
곤도파레스 1세는 원래 오늘날 시스탄의 통치자였으며, 아마도 아프라카라자스의 가신 또는 친척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시스탄의 이전 파르티아 총독들을 대체했을 수도 있다. 이 파르티아 사트라프들은 미트리다테스 2세(기원전 124–88)가 사카스탄의 사카족을 정복했을 때부터 사카스탄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기원전 20-10년경,[4] 인도-스키타이 왕국의 아제스 사후에 곤도파레스는 이전 인도-스키타이 왕국에서 정복 활동을 벌였다. 곤도파레스는 아라코시아, 사카스탄, 신드, 펀자브, 카불 계곡으로 구성된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지만, 펀자브 동부 너머의 영토를 차지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5] 곤도파레스는 자신을 "왕중왕"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그의 경우 인도-파르티아 제국이 느슨한 틀일 뿐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파르티아의 칭호이다. 많은 소규모 왕조들은 곤도파레스와 그의 후계자들에 대한 복종을 대가로, 인도-파르티아 시대 동안 확실히 그들의 위치를 유지했다. 이 소규모 왕조들은 아제 동전을 모방한 익명의 스키타이인들뿐만 아니라, 아프라카라자스, 자이오니소스, 라주불라와 같은 인도-스키타이 사트라프들을 포함했다. 카하라타는 또한 곤도파레스의 영토 바로 밖에서, 구자라트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서기 20년경, 파르티아인 정복자 중 한 명인 곤도파르네스는 파르티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정복한 영역에 인도-파르티아 왕국을 건설했다. 인도-파르티아인은 팔라바스(Pahlavas)로 인도인들에게 알려져 있으며, 야바나스(Yavanas), 사카(Sakas)와 함께 종종 인도의 문서에 등장한다.
2. 2. 분열과 쇠퇴
곤도파레스 1세의 사후, 인도-파르티아 왕국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곤도파레스 1세의 아들 사르페도네스가 곤도파레스 2세로 즉위하여 후계자를 자처했지만, 그의 통치는 불안정했고,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신드, 펀자브 동부 및 아라코시아에서 분할된 주화를 발행했다. 곤도파레스의 조카인 아브다가세스는 펀자브와 아마도 사카스탄에서 통치했다. 사르페도네스의 짧은 통치 이후, 오타그네스가 곤도파레스 3세 가다나로 즉위하여 사르페도네스의 자리를 계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르타그네스는 서기 1세기 동안 아브다가세스와 함께 사카스탄과 아라코시아 대부분을 통치했으며, 그의 아들 우보자네스가 그 뒤를 이었다.[6] 서기 20년 이후, 아프라카라자의 통치자 아스파바르마의 조카인 사세스라는 왕이 아브다가세스의 영토를 점령하고 곤도파레스 4세 사세스가 되었다.그 외에도, 사나바레스는 시스탄에서 스스로를 왕중왕이라 칭한 일시적인 찬탈자였고, 신드의 아가타, 사타바스트레스라는 통치자, 그리고 파르티아의 실제 지배 왕조의 일원이라고 주장하는 익명의 제후도 있었다.
그러나 인도-파르티아인들은 곤도파레스 1세의 지위를 회복하지 못했고, 서기 1세기 중반부터 쿠줄라 카드피세스 아래의 쿠샨 제국에게 왕국의 북부 인도 지역을 흡수당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인도-파르티아인들은 투란과 사카스탄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는데, 그들은 서기 230년경 사산 제국에 의해 파르티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지배했다. 파하레스 1세(160-230년)는 인도-파르티아 왕국의 분할 이후 투란의 통치자였다.[7] 사카스탄 왕국은 사나바레스 2세(160-175년)라는 이름의 두 번째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8] 투란과 사카스탄 왕국은 서기 230년경 사산 제국의 통치자 아르다시르 1세에게 항복하면서 멸망했다.[8]
마지막 왕인 파코레스(100년 - 135년)는 사카스타와 투란만을 지배했다. 2세기 중앙 인도의 사타바하나 왕조(안드라 왕조)의 왕 가우타미푸트라 샤타카르니(106년 - 130년)는 스스로를 "사카(서(西) 크샤트라파)", 야바나(인도-그리스인), 파라바(인도-파르티아인)를 멸하는 자"라고 칭했다.
2. 3. 사산 제국에 의한 멸망
인도-파르티아인들은 곤도파레스 1세의 지위를 회복하지 못했고, 서기 1세기 중반부터 쿠줄라 카드피세스 아래의 쿠샨 제국에게 왕국의 북부 인도 지역을 흡수당하기 시작하였다.그럼에도 인도-파르티아인들은 투란과 사카스탄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는데, 그들은 서기 230년경 사산 제국에 의해 파르티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지배했다. 파하레스 1세(160-230 AD)는 인도-파르티아 왕국의 분할 이후 투란의 통치자였다.[7] 사카스탄 왕국은 사나바레스 2세(160-175 AD)라는 이름의 두 번째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8] 투란과 사카스탄 왕국은 서기 230년경 사산 제국의 통치자 아르다시르 1세에게 항복하면서 끝났다. 이 사건들은 알타바리에 의해 기록되었고, 고르에 있는 아르다시르로 사절들이 도착한 것을 묘사했다.[8]
3. 주요 통치자
통치자 | 통치 기간 | 비고 |
---|---|---|
곤도파레스 1세 | 19년 ~ 46년 | 인도-파르티아 왕국의 창시자. 왕중왕 칭호 사용. |
곤도파레스 2세 사르페도네스 | 1세기 초 (20년경) | 곤도파레스 1세의 아들. 통치가 흔들림. |
아브다가세스 1세 | 1세기 | 곤도파레스 1세의 조카. 펀자브와 사카스탄 통치. |
곤도파레스 3세 가다나 (아마도 오르타그네스) | 20년 ~ 30년 | 사르페도네스의 뒤를 이음. |
곤도파레스 4세 사세스 | 1세기 중반 | 아브다가세스의 영토 점령. |
우보자네스 | 1세기 후반 | 오르타그네스의 아들 |
파코레스 | 1세기 후반 | |
사타바스트레스 | 60년경 | |
아브다가세스 2세 | 90년 |
4. 문화
인도-파르티아의 문화는 종교, 예술, 복식 등 다양한 측면을 포함한다. 인도-파르티아인들은 파르티아 제국과 종교적 갈등을 겪었지만,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그리스 왕국이나 인도-스키타이 왕국과는 달리 불교 관련 기록은 명확히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곤도파레스 1세 시대에는 힌두교 신 시바의 주화가 발행되기도 했다.[20][21][22]
226년 사산 제국에 점령당한 후에도 일부 파르티아 통치는 동방에 남아있었으며, 2세기부터 중앙아시아 불교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활동하며 불교 경전 번역에 기여했다.
인도-파르티아인들은 예술 분야에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특히 간다라에서 발견된 돌 팔레트는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또한, 시르캅에서 발견된 조각상들은 초기 간다라 미술의 발달된 상태를 보여준다.
복식은 짧은 크로스오버 재킷과 헐렁한 바지가 특징이며, 머리띠를 포함한 덥수룩한 머리카락은 당시 파르티아인들의 일반적인 관행이었다.[24]
4. 1. 종교
인도-파르티아인들이 조로아스터교를 믿던 파르티아 제국과 종교적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은 알려졌으나 수렌 가문이 어떤 종교를 믿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19] 인도-그리스 왕국 또는 인도-스키타이 왕국과 달리 헌금, 비문 또는 심지어 전설적인 설명에서도 인도-파르티아 통치자들이 불교를 믿었다는 명시적인 기록은 없다. 또한 인도-파르티아 동전은 일반적으로 그리스 화폐를 밀접하게 따르지만 불교 트리라트나 기호를 표시하지 않으며 코끼리나 황소의 그림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란에서 전래된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이란 신화 체계는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지역에서 통치했던 후기 쿠샨인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곤도파레스 1세 시대에 힌두교 신 시바의 주화도 발행된 것으로 밝혀졌다.[20][21][22]
226년 사산 제국의 지배 이후에도 파르티아인의 고립된 영토가 동쪽에 잔존했다. 2세기부터 중앙아시아의 불교 전도사들은 중국의 수도 뤄양이나 난징에서 불전 번역 활동으로 유명해졌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최초로 불전을 중국어로 번역한 것은 파르티아인 전도사였다. 중국에서는 파르티아인을 파르티아(안식국) 출신임을 나타내는 '안'씨 성으로 식별했다.
이름 | 설명 |
---|---|
안세고 | 파르티아의 왕자. 처음으로 소승 불교 계열의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
안현(en) | 파르티아의 상인으로, 181년에 중국에서 승려가 되었다. |
담체 (254년) | 파르티아인 승려. 『담무덕갈마』를 번역했다. |
안법흠 (281년 - 306년경) | 파르티아 출신 승려. |
4. 2. 예술
인도-파르티아인은 동전과 간다라 미술에서 짧은 크로스오버 재킷과 큰 헐렁한 바지를 입고, 챕과 같은 오버 바지로 보완된 모습으로 묘사된다.[23] 재킷은 장식 반지나 메달로 장식되어 있다. 머리카락은 덥수룩하고 머리띠를 하고 있는데, 이는 서기 1세기부터 파르티아인들이 주로 채택한 관행이다.[24]인도-파르티아 복장을 한 사람들은 불교의 경건한 장면에서 배우로 등장하기도 한다. 존 마샬이 탁실라 근처 시르캅에서 발굴한 유적은 인도-파르티아 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인도-그리스 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25] 이러한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헬레니즘 유물과 불교 예배 요소(스투파)가 결합된 유물이 발견되었다. 인근 잔디알과 같은 사원은 조로아스터교의 배화신전으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스키타이 후기에서 파르티아 층(2층, 1-60 AD)의 시르카프에서 발견된 조각상들은 그 당시 또는 파르티아 통치 이전에 이미 발달된 간다라 미술의 상태를 암시한다. 헬레니즘적인 신들로부터 다양한 간다라 평신도들에 이르는 다양한 조각상들은 부처와 보살들의 초기 표현들 중 일부로 생각되는 것과 결합된다. 간다라 미술이 정확히 언제 등장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시르카프도에서의 발견들은 이 미술이 쿠샨족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고도로 발달되었음을 나타낸다.
간다라에서 발견된 돌 팔레트는 인도-파르티아 예술의 좋은 대표자로 여겨진다. 이 팔레트는 파르티아 예술의 특징인 정면성과 함께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영향을 결합한다. 그러한 팔레트는 인도-그리스, 인도-스키타이 및 인도-파르티아 통치에 해당하는 고고학적 층에서만 발견되었고, 이전의 마우리아 층 또는 이후의 쿠샨 층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26]
이 팔레트들은 신화적인 장면에서 그리스 복식을 한 사람들을 나타내지만, 몇몇은 파르티아 복식을 한 사람들을 나타낸다(흐린 머리 위의 머리띠, 맨 가슴에 걸친 크로스오버 재킷, 보석, 벨트, 헐렁한 바지). 프라하의 나프르스테크 박물관의 팔레트는 인도-파르티아 왕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고, 파르티아 복식을 한 두 명의 수행원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포도주를 마시고 서빙하는 모습이 보여진다.
4. 3. 복식
인도-파르티아인은 동전과 간다라 미술에서 짧은 크로스오버 재킷과 큰 헐렁한 바지를 입고, 아마도 챕과 같은 오버 바지로 보완된 복장으로 묘사된다.[23] 재킷은 장식 반지 또는 메달로 장식되어 있다. 머리카락은 일반적으로 덥수룩하고 머리띠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서기 1세기부터 파르티아인들이 주로 채택한 관행이다.[24]인도-파르티아 복장을 한 사람들은 때때로 불교의 경건한 장면에서 배우로 등장하기도 한다. 존 마샬이 탁실라 근처의 시르캅에서 발굴한 대부분의 유적은 인도-파르티아 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최근의 학계에서는 인도-그리스 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25]
5. 고고학적 사료
탁실라는 인도 파르티아인의 수도로 추측된다. 존 마르샬은 이곳에서 많은 파르티아 양식의 유물과 함께 큰 지층을 발굴했다. 근처 잔디알의 사원은 일반적으로 인도-파르티아 시대의 조로아스터교 신전으로 추측된다.[10]
고대 문헌 중에는 인도의 구드나파르(곤도파레스로 추정) 왕의 궁정에서 목수로 일한 사도 토마스의 이야기가 있다. 토마스 행전 17장은 토마스가 인도 북부의 구드나파르 왕을 방문하는 것을 묘사하고, 2장과 3장에서는 토마스가 인도 서쪽 해안으로 가는 해상 항해를 시작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니어의 연구에 따르면 곤도파레스 1세는 서기 1년 이전에도 연대가 측정될 수 있었지만,[10] 이 기록이 역사적인 것이라면, 사도 토마스는 같은 칭호를 가진 후대 왕들 중 한 명과 마주쳤을 수도 있다.
필라스트라투스가 쓴 <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의 생애>에서 그리스 철학자 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는 서기 46년경에 인도를 방문했으며 특히 탁실라를 방문했다. 그는 그리스 양식의 건축물이 있는 시르캅을 묘사하고,[11] 그곳에 있는 인도-파르티아 탁실라의 왕 프라오테스가 그의 아버지의 궁정에서 그리스어 교육을 받고 유창한 그리스어를 말했다고 설명하였다.[12][13]
아라비아해를 항해하는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경로를 묘사한 1세기 가이드북인 에리트라해의 페리플러스는 이전 인도-스키타이인들의 통치로 인해 그 당시 전통적으로 "스키티아"로 알려진 신드 지역에서 서로 싸우고 있는 파르티아 왕들의 존재를 묘사한다.[16]
타크티- 바히의 비문에는 마하라자 구드브하라(곤도파레스로 추측)의 연호 26년과 알려지지 않은 시대의 103년이라는 두 개의 날짜가 있다.[18]
6. 실크로드와 불교 전파
226년 사산 제국에게 점령당한 후에도 파르티아 통치의 일부가 동방에 남아있었다. 2세기부터 몇몇 중앙아시아 불교 선교사들이 중국의 수도 뤄양과 때로는 난징에서 활동했는데, 이들은 특히 번역 작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최초로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이들은 사실 파르티아 선교사들로, 중국어로 '안시'의 '안'이라는 파르티아 성('아르사케스의 나라'라는 뜻)으로 구별된다.
참조
[1]
간행물
Indo-Parthian Kingdom
https://onlinelibrar[...]
John Wiley & Sons, Ltd
2023-01-28
[2]
문서
New light on the Parataraj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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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ic reference: "The dynastic art of the Kush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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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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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iplus of the Erythraean Sea, Chap 38
http://www.fordh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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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fordh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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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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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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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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